폴 비릴리오의 책 <bunker archeology 벙커 고고학>은 의미심장한 책이다. 프랑스 건축철학자인 비릴리오는 어린시절 노르망디 해안가에서 나치의 콘크리트 벙커를 보았다. 망망한 바다를 향한 벙커들은 공간과 시간, 역사와 기억,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징후를 보여주었다. 그는 고고학자의 시선으로 벙커를 바라보고, 마침내 새로운 건축이론을 이룩해냈다. 이 벙커를 찍은 수많은 아름다운 사진들을 퐁피두 센터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에 앞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책에 수록된 벙커 사진들이었다. 이 벙커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는, 적국 나치의 전쟁수행물로서 끊임없이 메시지를 생산하고 있다. 아마도 세상에 또다른 거대한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그 자리에 남아 숱한 이야기를 뿌리게 되리라.




벙커, 공장, 창고와 같은 건축물은 그 나름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인간의 스케일, 인간의 감각을 넘어선 극단적인 공간들에서, 우리는 압도적인 감흥을 받고는 한다. 단순하고 거대한 공간, 장식없는 무뚝뚝한 기능적인 공간이 아기자기한 집이나 화려한 저택이나 고풍스러운 성들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부스러진 모서리나 곰팡이가 흔적을 남긴 동그란 무늬뿐만 아니라, 그저, 창이 없거나 턱없이 작은 낯선 구조물 속에 물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감각들. 이런 공간에서 인간이라면 마치 환각에 빠진 듯 하나의 생각밖에는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공간을 설계한 사람은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건축의 구조와 언어를 짜맞추었을 것이며, 이런 공간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이유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문화유산 중에서도 산업유산이나 전쟁 유산, 혹은 군사 유산 등으로 명명된 장소들을 특수하게 들여다 봐야하는 데는 좀더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맥락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맥락을 더듬다 보면, 당대 사람들의 심리, 감정, 생각들에 다가갈 수 있을 거다. 그 지점은 무척 흥미롭다. 


















가덕도 외양포의 일본군 벙커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견하고서, 부산 휴가의 마지막 여정으로 외양포에 들르기로 했다. 외양포는 1904년 러일전쟁을 위해 일본군의 진지가 구축된 곳이다. 당시에 지어진 것들로는 사령관 관사, 장교관사, 막사, 위병소, 창고 등인데, 남아있는 것만 해도 32개동에 이른다고 한다. 포대 진지 역시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남아있으며, 그외 시설은 주민들이 주거로 사용하고 있다.



가덕도는 분명 섬이다. 최근 들어 부산 신항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굳이 배를 탈 필요가 없다는 점이나 부산과 거제도를 연결하는 거가대교의 연결지점,즉, 고속도로가 바다 밑 해저터널을 향해 돌진하는 지점에 있어 섬의 초입에 꽤나 유입인구가 생겨났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조용한 어촌 마을이다. 근처 바다로 낚시하러 나가는 꾼들이나 물놀이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주민의 수도 많지 않고 푸른 숲이 우거진 이 섬이 꽤나 즐거운 놀이터처럼 보이리라. 다만, 지금도 꽤 폭이 넓은 도로들로 섬을 가로지르는 공사가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조금 의아스러울 법도 하다.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거나 주민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지도 않은 조용한 마을에 이토록 도로 공사를 많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방 토건족들의 나랏돈 먹기 사업은 아닐까.






가덕도가 이토록 조용한 이유는 이곳이 여전히 군사시설 보호지역이 넓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외양포는 증개축이 불가한 국유지로 오랫동안 묶여있었고, 외양포 남단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군사제한지역이 이어진다.


제한 지역은 남쪽 바다를 삼면에 바라보는 섬의 하단부 지역인데, 그곳에 1910년에 지어진 가덕도 등대가 있다. 2009년 여름, 취재를 위해 가덕도 등대를 방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날도 오늘처럼 맑았고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풀들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바다를 향해 불쑥 내민 평평한 땅은 바다를 감시하기에 적당한 위치였다. 섬의 끄트머리에 서니, 1905년 러일전쟁 시기, 러시아의 북항함대와 일본해군이 격전을 치렀던 그 바다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 해전은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의 승세를 일본으로 기울게 했다. 이 해전에 대비하게 위해 일본 해군은 가덕도에 진지를 구축했다. 



가덕도 앞바다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중요한 군사지역이었다. 

부산과 진해를 방어하는 요충지로서.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대항포를 지나 외양포로 가는 지역을 내려다보면천혜의 요새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다. 대항포를 지나 높다란 언덕을 올라간 후 바다쪽으로 휘어지고 내륙으로 움푹들어간 도로를 따라 가면 완만한 호를 그리고 있는 외양포가 멀찍이서 보인다. 바다로 시선을 던지면 동남해안권의 섬들이 서로 마주보며 겹을 이루고, 또 트여진 틈으로 먼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마을 쪽은 또 어떤가? 올망졸망 나즈막한 집들이 드문드문 자리잡은 그곳은, 외지인에게는 그저 한촌의 유유자적한 모습 그대로였다. 오래묵은 집들을 낡은 옷을 수선하듯 그렇게 조금씩 수선하고 수리하면서 살아온 그런 모습들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일본식 기와가 얹혀진 지붕, 비늘판벽으로 마감한 외부, 창문의 구조 등으로 가옥의 본래 형태를 더듬을 수 있다. 


태양도 열기를 삼킬 수 없어 뱉어내고만 있던 그 한낮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있는 듯 고요했다. 올망졸망 매달린 살림살이들이 아니었다면 인적은 전혀 감지할 수 없고, 풀벌레와 까마귀들만이 울어 재끼는 이 마을에 쉽게 다가갈 수 없었을 것이다. 









가덕도 외양포의 일본군 포대 진지.  



외양포 마을 배치도 

(자료 출처-<가덕도 외양포의 일본군사시설에 관한 연구>, 이지영, 서치상, 건축역사연구 제 19권 3호 통권 70호 2010년 6월)









<가덕도 외양포의 일본군사시설에 관한 연구(이지영, 서치상 저, 건축역사연구 제 19권 3호 통권 70호)>는 기밀 해제된 육군성대일기류의 <밀대일기> 등의 사료를 통해 확인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외양포 일대를 좀더 조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때는 1904년 8월 3일로, 우리가 갔던 날처럼 무더운 여름이었다. 일본군 제3임시 축성단 소속의 공병 소좌 마쓰이 쿠라노스케가 책임자로 외양포에 나타났다. 그는 전쟁 수행에 적합 여부를 판단하여 외양포 일대에 군사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해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진해 일대를 군사지역으로 확보했고, 외양포는 임시군사기지로 선택했다. 마쓰이 소좌를 필두로 다양한 조사를 벌인 후 주민의 가옥 64채를 매수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제대로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터전을 잃어버렸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일제는 그 자리에 280mm 유탄포 포대와 탄약고, 군사령부 사무실과 관사와 막사, 창고, 위병소, 우물 등을 세웠다. 반듯한 교통로가 닦이고 통신망이 깔렸으며, 정기적으로 시험사격이 행해졌다. 








포대 진지의 북측 탄약고. 두 개의 탄약고가 있고 오른쪽은 와플형 콘크리트 구조물을 이어붙였다. 방음과 엄폐용이다.  








포대 진지는 대략의 위치를 알고 있음에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대나무 숲과 덤불이 뒤덮어 언덕배기 정도로만 보였다. 평평한 길과 그 앞에 세워진 비석을 보고서 그 안쪽으로 들어가자 눈앞에 진지가 펼쳐졌다.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얼룩덜룩한 색이 퇴색되고 바래졌지만 분명히 남아있는 그곳은 벙커였다. 



연구 보고서에는 포대 진지에 구축된 구조물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북측에 두 개의 탄약고와 옹벽이 있고, 맞은 편에 출입구가 있는 두 개의 구조물이 있는데, 포측탄고(대피소)라고 했다. 그 사이의 평평한 공간에 280밀리 유탄포를 장착하는 포창이 각각 2개씩 모두 6개가 있었다. 포창의 흔적은 풀로 뒤덮여 거의 남아있지 않다. 두꺼운 콘크리트 구조물은 대나무를 심어 내부를 엄폐했고, 와플형 콘크리트 구조물을 연결하여 벽을 친 것은 방음과 안전을 위해서라고 한다. 유탄포의 형태를 찾아보니 위의 사진과 같은 이미지를 찾을 수 있었다.


벙커의 규모는 폭 18미터, 길이 78미터이며 적의 공격에 포를 보호하기 위해 콘크리트 천장은 수십cm로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으로 무척이나 단단하게 지어진 외양포 벙커. 후에 외양포에 주둔했던 사령부가 진해와 마산으로 옮겨간 후에도 일제 패망까지 수차례 증개축하고 보수했다. 그러나, 외양포의 포대진지는 정작 실전에 사용된 적은 없고, 포대 시험 사격 등의 일들이 있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알록달록한 페인트는 언제 칠해진 것이며, 불탄 흔적들은 어떤 의미일까?  군사지역으로 설정되면서 우리 군도 이 장소를 이용했을까? 그리고 이곳에 있던 280밀리 유탄포는 어떻게 되었을까? 태평양 전쟁에 이르러 훨씬 강력한 화기들이 등장하면서 퇴물이 되어버린 수많은 무기들의 운명은? 



폴 비릴리오가 보았던 노르망디 해안의 나치 벙커뿐만 아니라, 우리 땅의 해안 요지에도 여전히 수많은 벙커들이 남아있지 않을까? 











부분적으로 불탄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나, 이것이 전쟁 수행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 후대에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벽에 칠해진 페인트도 언제 형성된 것인지 궁금증이 남는다. 




포측탄고(대피소)의 입구. 내부에는 창이 없는 넓은 공간이 있다. 포측탄고는 2개가 있으며, 내부에서 이어지지 않는다.  

나무와 풀이 마구잡이로 자라나 외부에서 보면 완만한 둔덕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맞은 편 탄약고는 내부 깊은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똑같이 상부에 불탄 흔적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포측탄고의 벽에 그려진 그림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좌)1909년에 지어진 위병소. 헌병대가 사용했다. 좌측의 하늘색 부분은 최근에 증축된 것.

(우)포대 사령부의 사무실 건물. 일본식 기와를 얹고 골함석으로 마감했다.




비늘판벽와 일본식 기와를 확인할 수 있는 집들. 사무실, 관사, 막사 등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규모가 큰 막사나 관사는 이렇듯 여러 세대가 나눠서 쓰고 있다. 

집집마다 사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변모한 외관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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