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늘 마주치는 건물이지만 한국은행 본관이 화폐박물관으로서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복잡한 도심 한복판의 소음과 밀도와는 떨어져 과거로 쑥 빨려들어온 것 같은 그런 시간 속에 머물게 된다는 것도. 



사실, 박물관 전시물이 아주 재미있게 꾸며진 것은 아니다. 내부는 답답하고 위압적인 느낌도 있다. 쉼터에서 다정함을 읽기도 어렵고 기념품가게의 물건이 그렇게 다양하지도 않다. 나 역시도 자주 방문하는 장소는 아니다. 



얼마전, 을지로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이 건물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고, 시간 여유가 있었던 까닭에 1,2층을 두루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잔잔한 빛이 새어드는 모퉁이 계단에서 유렵 어느 성채 안에서나 봄직한 나선형 계단을 발견했다. 



이렇게 예쁜 계단이 이곳에 숨겨져있었다니.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단을 꼽으라고 한다면 순위에 들 수도 있겠다. 은은한 조명과 바깥에서 스며드는 햇살이 기분좋게 계단에 스며들고 있었다. 계단의 아랫쪽 1층에는 앉아 쉴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다. 비록 멋없는 사무의자긴 하지만. 




철을 접고 용접하여 만든 계단은 또한 주철로 모양낸 버팀대로 지지된다. 둥글게 휘어지도록 촘촘하게 용접한 계단은 틀림없이 그 시대에는 자랑거리였으리라. 화강석을 아낌없이 쓰고 원통형 돔 기둥이 사방에 놓여 마치 중세풍의 성곽처럼 위풍당당한 건물이었으니 내부의 장식들도 그에 어울릴만큼 화려하고 육중하고 고전적인 서양의 양식 그대로였을 것이다.


이곳만큼은 1910년대 건물이 처음 생겨났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되었다. 






















이 크고 웅장한 은행의 시작이 자주적인 우리 금융이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머지 않은 광교에 대한천일은행 건물인 '광통관'- 현재는 우리은행으로 사용중이다-이 우리 금융사의 초반에 등장하여 다소 아쉬움을 덜어준다. 광통관은 다음에 다시 한번 이야기나누기로 하고. 



한국은행 본관의 건립 연도는 1912년이다. 제일은행 본점(1933), 신세계백화점(1930), 한국전력 남대문로 지점(1920)  등 을지로 일대의 근대건축물 중에는 가장 앞선 연대이다. 공사 착공은 1907년의 일이니 공사기간에 4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김정동 교수의 글에 따르면, 츨근콘크리트조에 석조를 입힌 것으로, 일본 건축계의 거장인 다쓰노 긴코가 설계했고 공사는 그의 제자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했다. 건축 형태는 일본의 은행들이 모델로 삼고있는 영국의 잉글랜드은행 본점과 벨기에 국립은행 본점 등을 참고로 했다. 종탑처럼 둥근 돔을 건물의 모퉁이마다 세웠는데, 그 위치가 위에서 보았던 회전형 계단이 있는 곳이다. 외부의 근사한 석재들은 창신동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들이고 벽돌은 관립연와제조소의 것이며 총 411만3천5백매가 사용되었다. 철골은 미국 카네기사의 것이며, 셔터와 창틀은 영국 헨리 호프 사 제품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공들여 치장한 건물의 뒷 배경에는 제국주의 시대의 첨예한 이권 다툼이 있었다. 


이른바 '고문정치'라 불리던 시기가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고문들을 정치에 깊숙이 개입시켰던 시기다.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등장한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는 재정과 금융을 일제에 종속시킬 목적으로 화폐개혁을 시행하고, 일본제일은행을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으로 만들기 위한 법안에 착수한다. 


일본 본토에서 조선의 중앙은행에 알맞는 기관을 두고, 제일은행이 그 역할을 해야하는가, 새로운 은행을 설립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독자적인 식민지배를 위해서는 새로운 기관으로서 한국은행 설립을 지지했고 1909년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설립되었다. 대한제국의 은행이라는 의미로 한국은행이다. 이 은행은 그 동안 일본제일은행이 해온 여러 권한과 역할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한일병합 이후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법령도 바뀌었다.  



1907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이 건물은, 처음에는 일본제일은행 경성총지점이었다가 한국은행이 되었으며, 공사가 끝난 후에는 조선은행으로 또다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것은 이름만 바뀐 것은 아닐 터이다. 이름 뒤에는 한 나라의 운명이 스려져 가는 동안, 돈과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던 시절이 숨어있다. 






2001년에 건물을 복원하고 화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할머니의 지폐를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무수하게 바뀐 화폐들은, 단순히 돈의 가치를 판단하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권력집단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이며, 나라가 크게 성장할수도 인플레이션으로 폭삭 망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을 분명하게 전달한다. 화폐는 돈의 가치를 넘어서고 은행은 이 모든 이권들이 오가는 현장을 침묵하고 은폐하고 증언하고 또 만천하에 드러내는 장소다. 





내부 계단에서 발견한 꺽임 장식. 정확한 명칭이 있을 텐데..






한국은행 본관 모형. 뒷모습이 거울에 비춰졌다.























모던뽀이 박태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는  구보가 하루종일 경성의 중심지를 기웃거리며 탄식하고 냉소하고 사색하고 대화하는 소설이다. 구보씨의 산책이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하는 즈음에 이런 장면이 펼쳐진다. 


"조선은행 앞에서 구보는 전차를 내려, 장곡천정으로 향한다. 생각에 피로한 그는 이제 마땅히 다방에 들러 한 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벰베르크 실로 찐 보일 치마. 삼 원 육십 전. 하여튼 팔 원 사십 전이 있으면, 그 소녀는 완전히 행복일 수 있었다. 그러나, 구보는, 그 결코 크지 못한 욕망이 이루어졌음을 듣지 못했다. 

구보는, 자기는, 대체, 얼마를 가져야 행복일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1934년, 조선은행 주변에는 넘치는 백화점과 은행과 상점과 식당과 카페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글을 써서 푼돈을 버는 구보 씨는 돈이 넘쳐나는 이 거리에서, 욕망해봐야 소용 없는 것들과 욕망할수조차 없는 것들과  그럼에도 욕망할수밖에 없는 것들 사이에서 냉소와 침울의 시선을 던진다. 그보다 30년, 메가다와 이토가 가져간 이 나라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한 세대가 지난 후 구보와 이상처럼 침울한 고학력 룸펜들이 유령처럼 떠돌던 그 거리를 나도 걷는다. 



그런데, 지금부터 한 세대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금 이토록 우울한 잉여계급들이 속출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며 나는 한잔의 홍차를 마시러 카페로 향하는 구보씨의 환영을 따라 은행에서 빠져나와 소공로를 따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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